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-우크라이나 관계 (문단 편집) === 21세기 이전 === 과거 [[러시아]]의 [[시베리아]] 개척 당시에는 [[카자크]]들이 주로 활약하였다. [[루스 차르국]]이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[[청나라]] 국경을 침략할 당시 탐사대의 주력은 카자크로 [[나선정벌]] 당시 [[조선군]]과 교전한 [[러시아군]] 역시 카자크였다. 카자크 외에도 [[러시아 제국]]이 시베리아를 건너 [[외만주]]도 병탄할 무렵, 우크라이나 [[민족주의]] 활동을 하다가 정치적 이유로 유배, [[정치범 수용소]] 등으로 강제이주되거나 경제적 이유로 땅을 개척하러 온 [[우크라이나인]], [[폴란드인]] 등등도 적지는 않았다. 오늘날에도 [[연해주]]의 [[러시아인]]들 중에는 [[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|우크라이나계]] [[성씨]]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이기도 하다. 훗날 외만주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[[러시아 혁명]] 이후 [[연해주]] 땅에 [[젤레나 우크라이나]]를 세워 [[러시아 내전]] 때 [[소련]] [[볼셰비키]] 정권에 저항한 적도 있었지만 [[적군]]에 패배하여 훗날 소련령 만주 또는 러시아 만주가 되었다. 이러한 연유로 근대 [[연해주]]에도 상당한 수의 [[우크라이나인]]들이 정착하여 [[고려인]]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. 1920~22년에는 연해주에 [[젤레나 우크라이나]]가 들어서 현지 고려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. 이 외에도 [[안중근]] 의사가 [[이토 히로부미]]를 저격한 만주의 [[하얼빈시]] 역시 [[고골]] 거리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인 밀집 거주 지역이 있었을 정도로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적지 않았다. 1931년 기준 하르빈에 거주했던 우크라이나계 인구는 2~3만여 명 정도로 추산한다. 한 때 번성했던 하르빈의 동유럽인 커뮤니티는 [[일본 제국]]이 하르빈에 [[731 부대]]를 건설하고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진행하면서 큰 위협을 받고[* 일본에서는 731부대의 희생자들이 소련군 포로라고 하고 있으나 생체실험 피해자 상당수가 [[임산부]] 등 민간인 [[여성]]이나 어린이였다.] 대다수는 일제의 [[제국주의]] 침탈을 피해 [[상하이]]를 거쳐 [[미국]], [[호주]] 등으로 탈주하였다. 20세기 초반 하르빈에 건설된 [[유대인]] [[시나고그]]는 오늘날 하르빈 [[조선족]]들의 학교로 개조되었다. 1922년에는 [[블라디보스토크]]에서 [[원산]]으로 [[백군]] [[난민]] 9천여 명이 피난하였는데[[https://www.kci.go.kr/kciportal/ci/sereArticleSearch/ciSereArtiView.kci?sereArticleSearchBean.artiId=ART001742963|#]]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우크라이나계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. 물론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에 정착한 러시아/우크라이나 출신 난민들은 링크된 논문에 의하면 [[6.25 전쟁]] 당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납치되었고,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[[소련 해체]] 이후 한국에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. 한국 전쟁 당시에는 [[우크라이나계 미국인]] 일부가 미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